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디라 간디 (문단 편집) == 경제 정책 == 인디라 간디 총리는 총 3차례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5개년 계획]]아라는 개념 자체는 [[소련]]의 [[스탈린]]이 원조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시행된 정부주도의 경제정책이었는데, 사회주의 성향의 정당이던 인도 국민회의 역시 이 5개년 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이다. 제1차, 제2차, 제3차 5개년 계획은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1951년 시작됐고, 목표는 전쟁과 독립으로 피폐해진 인도를 재건하는 것으로 인도의 농업을 복구하고 식량 생산량을 대폭 늘리는 것이었다. 즉 200년에 걸친 영국의 수탈 끝에 망하기 직전의 인도에 호흡기를 붙여놓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1차 5개년 계획은 성공을 거두었고 목표 성장률이던 2.1%를 훌쩍 뛰어넘어 GDP가 무려 3.5%에 가까운 성장률을 보였으며[* 5%대라는 말도 있는 등 정확한 수치는 확인이 필요해보인다.] 국내 순생산은 15%나 증가했다. [[몬순]]과 풍작 덕에 식량난도 줄었고, [[외환보유고]]와 1인당 소득도 무려 8%나 증가했다. 여러모로 대단히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고, 이때 [[인도 공과대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다.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공에 고무된 네루 총리는 1956년 바로 제2차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1차 계획이 국가 재건과 농업 향상이었다면 이번의 주 목적은 인도의 산업화와 공공부문의 발전이었다. [[소련]]과 [[영국]], [[서독]]의 지원을 받아 곳곳에 [[제철소]]가 건립되었고, 수많은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철과 석탄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다만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해오는 방식 때문에 비판받기도 했고, 실제로 1957년에 외환지불위기에 직면하면서 일시적으로 경제에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래도 제2차 5개년 계획 역시 결과적으로 보면 성공적이어서 목표 성장률인 4.5%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4.27%라는 성장률을 찍을 수 있었다. 제1차 계획과 2차 계획이 연달아 성공을 거두자 신난 인도 정부는 야심차게 제3차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제3차 5개년 계획은 주로 밀 생산 증가와 농업 발전에 초점을 맞췄는데, 안타깝게도 제3차 5개년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1965년에 파키스탄과 전쟁이 벌어지며 농산물 가격이 폭등했고 [[가뭄]]까지 겹치면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정부는 경제성장이고 뭐고 물가 안정에 모든 힘을 쏟아야만 했고, 이과정에서 [[국제통화기금]]에 손을 벌려야 할 정도까지 추락했다. 1966년에는 처음으로 [[루피]]가 평가절하되기까지 했다. 목표 성장률은 전보다도 높게 잡은 5.6%였지만 실제 성장률은 2.4% 밖에 안됐다. 제3차 5개년 계획이 처참하게 실패하자 인도 정부는 재고 기간에 들어가 다시 목표를 재설정했다. 인디라 간디가 '''인도 총리를 맡게 된 게 바로 이 시점'''이었다. 즉,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총리의 급작스런 사망 이후 급하게 총리가 되었는데, 제3차 5개년 계획의 실패로 주춤하던 인도 경제를 살려야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맡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취임 초기 간디 총리는 속내야 어떻든 경제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자국의 통화가치 절하를 대가로 외국의 원조를 받기 시작했다. 그 덕에 1966년에 경제는 그럭저럭 회복세를 띄었고 경제성장률도 1969년까지 평균 4%대 성장을 기록했다. 하지만 미국 자본가들은 이런 원조를 대가로 점차 인도 내정에 깊이 간섭하려 들었고, 인도 정부가 지나치게 경제를 꽁꽁 닫아걸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와중에 [[베트남 전쟁]]이 터지고 인도 정부가 미국을 비난하며 닉슨 행정부와 관계가 경색된다. 미국은 이를 빌미로 인도에 대한 곡물 원조량을 줄여버렸고, 격분한 인디라 간디 총리는 다시는 외국 원조에 국가 식량계획을 기대지 않을 것을 천명하면서 더이상의 원조를 받지 않았다. 게다가 기존의 경제 자유화 정책까지도 대거 폐기해버린다. 인디라 간디 총리의 국가 통제 경제 정책은 1976년 대놓고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 경제를 선포'''하면서 절정을 찍는다. 이후 인도 정부는 기존의 민영화 정책과 자유주의 정책들을 뒤집어버린 후 대규모 국영기업 육성, 각종 민영기업 제재 등의 사회주의적인 정책들을 펼친다. 인디라 간디는 1969년 야심차게 제4차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제4차 5개년 계획의 주 목표는 식량 자급자족과 경제 자립, 그리고 보호주의 무역의 극대화였다. 이로 인해 이전까지 이뤄졌던 모든 자유화, 개방 정책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갔고 그 어떤 시절보다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경향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14개에 달하는 은행들이 모조리 국유화됐고, 그 외에도 부의 재분배와 균형잡힌 성장을 위해서 대규모의 국가 주도 사업이 전국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무엇보다 우선순위였던 [[식량]] 자립을 위해 녹색 혁명을 일으켜 실제로 꽤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농업]]을 제외하면 썩 그닥이었다. 인도 정부는 제4차 5개년 계획의 목표 성장률을 대략 5.6%로 잡았지만 실제 경제 성장률은 3%대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제4차 5개년 계획은 생각보다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74년에 수립된 제5차 5개년 계획은 이전의 제4차 5개년 계획에 비하면 중구난방에 얼기설기 끼워맞춘 조잡한 경제계획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애초에 체계적인 목적을 가지고 수립한 정책이 아니었고, 인디라 간디 총리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대충 경제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제5차 5개년 계획의 기본 목적은 심각한 [[실업률]] 해결과 빈곤률 감소였다. 인디라 간디 총리는 비상체제를 통해 얻어낸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인도 경제를 확실하게 휘어잡았다. 국가가 보호주의 무역정책을 펴고 시장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의외로 인도는 70년대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인한 세계적인 경제 혼란을 피해갈 수 있었고, 1973년의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난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다. 정부가 거의 초법적인 권한으로 국가 경제를 떠받쳤는데, 덕분인지 제5차 5개년 계획 동안 인도의 경제성장률은 5% 대를 찍으면서 기존의 목표 성장률을 훌쩍 넘겼다. 다만 비상사태가 끝나고 난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인디라 간디는 본인은 예상치 못했을 패배로 실각을 하고, 대신 상대방 [[모라르지 데사이]] 내각이 출범하면서 5개년 계획은 바로 철회된다. 허나 모라르지 데사이 총리와 자나타 당은 정치싸움에 매달리다가 인도 경제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인디라 간디의 실각 이후 인도의 경제성장률은 2년 동안 -5.2%라는 역사상 최악의 수치를 보였고, 18.2%라는 엄청난 인플레율을 보이면서 경제가 심각하게 악화된다. 이렇게 경제가 파탄나자 안그래도 자나타 당 내부의 싸움에 지쳤던 국민들은 다시 인디라 간디에게 힘을 실어줬다. 인디라 간디 총리는 1980년에 다시 총리직에 복귀했다. 간디 총리는 총리직에 복귀하자마자 기존 자나타 당의 경제정책들을 모두 폐기하고 제6차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제6차 5개년 계획의 경우 이전 계획들과는 달리 사회주의적 이념에 박혀있지 않았고 대신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택했다. 때문에 국영기업들의 효율화, 비대한 조직 정리 등이 이루어졌고 자본시장의 규제도 완화해주면서 실리적인 방법을 따랐다. 이 덕에 제6차 5개년 계획은 그동안의 5개년 계획 중 가장 성공적인 경제정책이 될 수 있었고, 인도 경제는 다시 매년 5% 대의 성장률을 보이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이후 인디라 간디 총리가 1984년 암살당하기 직전까지도 인도 경제는 그럭저럭 양호한 수준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